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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熊本) 는 일본 규슈(九州) 의 중앙에 위치한 구마모토 현(縣) 의 주도(州都) 이다. 일본의 옛 지명에서는 히고(肥後) 라 불리웠다.

구마모토를 다녀온 친구 말로는, 구마모토 시는 우리나라의 강남구 정도밖에 안되는 작은 도시라 별로 볼게 없다고 비추했지만, 사실 이번 여행에서는 구마모토가 매우 가보고 싶던 도시중 하나였다. 무엇보다도 일본 3 대 성(城) 중 하나로 꼽히는 구마모토 성을 보고 싶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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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고(肥後)지방 - 지금의 구마모토 현(熊本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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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고야 성, 오사카 성과 함께 일본 3대 성(城) 의 하나로 꼽히는 구마모토 성.

구마모토 성이 있던 히고 지방은 본래 16 세기 일본 전국시대(戰國時代) 당시에는 규슈 지방의 유력 영주인 오토모 소린(大友宗麟) 이 지배하고 있었다. 1587년 전국시대의 걸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규슈를 정벌한 직후 히고 지방을 삿사 나리마사(佐々成政) 에게 하사한다. 하지만 삿사 나리마사가 지배하던 히고는 토착무사의 거듭된 반란으로 제대로 통치가 되지 않았고, 삿사는 영지를 하사받은지 1년만에 반란이 일어난 책임을 지고 할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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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사 나리마사의 초상. 원래 오다 노부나가의 부하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선배 무장이었으나 히데요시가 노부나가 사후 패권을 잡으면서 히데요시의 부하가 된다.

이듬해인 1588년, 주인이 없어진 히고를 히데요시는 반으로 나눠 북반국(北半國) 25만 석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에게 수여하여 구마모토 성을 지배하게 하고, 남반국(南半國) 24만 석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에게 수여하여 우토(宇土) 성을 지배하게 한다.
( 석(石)는 일본 전국시대 당시 영주가 통치하는 영지의 생산량을 나타내는 단위로, 1석(石) 은 1명의 병사가 1년간 먹을 식량을 의미한다. 100 만석의 영지를 가진 영주가 25,000 ~ 30,000 명의 병사를 동원할 수 있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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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는 신장의 야망 - 혁신. 가토 기요마사는 맹장으로 능력치가 높다.

이후 이 둘은 임진왜란 당시 각기 육군대장이자 1,2 군의 선봉장으로 조선에 출정한다. 1600 년 세키가하라(關原) 전투가 동군의 승리로 끝나자, 故 히데요시측 서군에 참가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참수당하고, 동군으로 참가했던 가토 기요마사는 공을 인정받아 고니시의 영지까지 모두 하사받고 히고 전국 52만석을 지배한다. 히고의 대영주가 된 가토 기요마사가 1601 년 부터 쌓기 시작한 성이 바로 구마모토 성이었으며, 7년만인 1607 년에서야 완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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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 성 내에서 찍은 가토 기요마사의 초상. 가토 기요마사는 임진왜란 당시에 육군대장 겸 제 2군 대장으로 규슈군(九州軍) 1만명을 이끌고 조선에 출병해 함경도까지 진격해서 임해군과 순화군, 조선의 두 왕자를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무장중에서는 가장 최북단까지 진격한 장수였고, 조선에서는 수많은 호랑이를 사냥해서 호랑이 가토 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가토 기요마사가 타고있는 저 호랑이도 조선호랑이일 것이다. ( 원래 일본에는 토착 호랑이가 없음.. )

1611 년 가토 기요마사가 죽고 그의 아들 가토 타다히로(忠廣) 가 대를 이었지만 1632년 친 히데요시 세력이던 가토 가문은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겨우 2대(代) 만에 숙청당하게 된다. (샘통이다... 조선에서 불국사를 불태우고 수많은 도공들을 잡아가는 등 갖은 악행을 저지른 것이 결국 그의 아들대에 이르러 천벌을 받은게 아닐까? 사필귀정이란 말을 믿는 나로서는 그런 생각을 계속 한다 ㅋㅋ ) , 어쨋든 이후 구마모토 성은 호소카와(細川) 가문의 영지가 되어 도쿠가와 막부 239 년간 11대에 걸쳐 호소카와의 통치가 이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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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이난(西南) 전쟁 당시의 모습. 성 내부에 전시되어 있는 사진을 촬영.

1877 년 메이지 유신 당시에는 막부군과 신정부군 사이의 전쟁인 세이난(西南) 전쟁의 전장이 되어 주요 건물이 소실되기도 한다. 1998년 부터 구마모토 복원 정비 정비계획이 시행되었고, 2007 년 올해는 구마모토 성의 축성 400 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복원 정비 작업을 마무리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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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이 1607년 지어진 구마모토 성의 축성 400 주년이 되는 해라고 성 곳곳에서 대대적으로 홍보 중이었다.

구마모토 성은 30만평의 대지에 7년여에 걸쳐 건립된 거대한 성이다. 예전에 오사카에 놀러갔을때 보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만든 오사카 성과 비교해서도 그 위용이 뒤지지 않는다. (물론 해자와 거대한 성벽은 오사카 성이 한수 위이긴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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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 성은 매우 구조적인 설계가 반영되었는데, 적의 병사들이 성벽을 쉽게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성벽의 각도와 지붕의 배치를 절묘하게 하였고, 성 위의 수비병이 성 아래의 병사들을 손쉽게 저격할 수 있도록 사격 포인트 (노弩 라고 한다) 가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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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안에서 급히 찍은 것이라 초점이 좀 안맞는다. 구마모토 성 앞에 서있는 가토 기요마사의 동상이다. 가토 기요마사는 우리 입장에서는 아주 죽일 넘이지만 일본에서는 굉장한 영웅으로 높이 받들어 모셔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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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기요마사가 임진왜란때 참전했던 전투중 특히 중요한 전투가 1597년 12월 23일∼1598년 1월 4일 사이의 겨울에 있었던 울산성 전투이다. 왜란 후반기에 주로 울산에 주둔해 있던 가토 기요마사는 울산성을 쌓고 그곳에 주둔하였는데, 그해 겨울 조, 명 연합군 5만명의 대대적인 공격에 맞서 울산에서 가토 기요마사를 포함한 왜병 1만 5천명은 농성전을 벌이게 된다. 나중에는 성 안에 물이 떨어져 수 많은 왜병들이 말라 죽고 흙탕물을 마시고 군마를 잡아먹는 악전고투를 벌인 끝에 간신히 농성에 성공한다.
가토는 이때 물 부족으로 하도 고생을 많이 한 것이 한이 맺혔는지 이곳 구마모토 성을 지은 후에는 성 내에 수많은 우물을 파게 했다. ㅋ 바로 위와 같은 우물들이 원래 성 내에 120 개나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10 여개만 남아 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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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 성의 꼭대기 층인 천수각(天守閣) 에 올라가서 찍은 사진이다. 구마모토 시내 전체가 성 위에서는 한 눈에 보인다. 옛날에는 높은 건물이 없었으니 이 곳 전체를 가장 높은 위치에서 볼 수 있는 곳은 바로 이 성의 천수각이었을 것이다. 이곳에서 영주는 자신의 영지를 내려다 보면서 영지의 형세, 군사들의 움직임을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흔히 사람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주위를 내려다 보면서 거시적인 관점에서 자신이 관리하는 조직을 전체적으로 보게 된다고 하는데, 성에 올라가 보니 예전에 성주들이 자신의 영지를 내려다보면서 느꼈을 그런 기분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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